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일치 하지 않는 사람을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 자연히 마음을 쓰지만,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것은 놓치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열심이 놓친 것도 사람들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8)

복음서에는 정 반대 되는 두 무덤이 나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의 빈 무덤이고(마 28:1-4), 또 하나는 바리새인의 회칠한 무덤이 그것입니다.(마 23:27) 빈 무덤은 자신을 비워 죽음에 내어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이고, 회칠한 무덤은 부활하지 못할 썩은 무덤입니다. 그런데 그 썩은 무덤의 주인공은 교회 밖이 아닌, 우리와 같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위선적 신앙은 있어도 위선적 불신앙은 잘 없기 때문이겠죠.

삶이 없는 신앙은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위선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는 이들이고, 예수께서 부르신 목적대로 ‘온전한 삶’(마 5:48)을 살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온전 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말은 곧잘 하지만 그 말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늘상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문제는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그것은 단지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한 질책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믿음 없이, 회개없이’ 습관처럼 교회 문을 여닫으며,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착각하는 이 들의 ‘자기기만’ 이야말로 위선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대신, 사람들 앞에 서려 하니 위선과 기만이 생깁니다. 게다가 위선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회칠이 감추고 싶은 부위를 숨기고, 더러움을 가리기 위해 덧칠하는 것이라면, 더러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덧칠은 더 두꺼워지기만 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그 안에는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더러움 가득한 썩은 무덤에서 어떻게 부활, 다시 사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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