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 6:27)
‘걱정과 근심과 염려’ “걱근염”이라고 줄여쓸 만큼 다른 듯 비슷한 말과 표현입니다. 이 들 사이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은 모두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일을 앞당겨 ‘지금’ 하는 것이죠. 정말이지 염려하는 것으로 그 염려를 얼마간이라도 줄일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염려를 앞당겨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염려는 하면 할수록 커지기만 하지, 줄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본래 내일 일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불확실 한 것인데, 그 불확실함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맞을 것인지, 기쁨과 감사로 맞이할 것인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과 불신의 간격만큼이나 커다란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그런데, 우리는 근심은 근심대로 하고, 근심하며 믿기도 하고, 또 믿으면서 근심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는 것처럼, (마 6:24), 빛과 어둠이 사귀지 못하는 것처럼 (고후 6:14), 걱정과 근심과 염려는 믿음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믿음을 집어삼키든, 믿음이 걱정과 근심을 밀어내든, 어느 쪽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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