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기억나는 기쁨의 ‘순간’이 언제 이었던가, 떠올려봅니다. 그러고 보면 기쁨은 ‘순간’ 의 일인가 싶습니다. 기쁨이 한 순간의 일이라면, 우리는 잠깐의 ‘기쁨’을 추구하며, 반복되는 일상을 감수하고 ‘무덤덤함’ 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무표정한 얼굴들처럼 말입니다. 그 표정들 속에 딱히 기뻐할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감사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하는가 하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족함이 없는 삶입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그렇습니다. 기쁨은 어디쯤 있었던가요? 대게 그렇듯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해 더 소유하는 것으로, 삶의 더 풍족한 조건들이 채워지는 것에서 얻는 기쁨은, 놀랄 만큼 유효기한이 짧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하는 말씀이 마냥 기쁘지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 16∼18)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마치 ‘원수를 사랑하라’ 는 계명처럼, 불가능한 짐을 더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기쁨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쁨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불평, 불만이 삶의 태도이자 습관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태도이자, 삶의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 삶의 방향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던 큰 아들의 편에서, 큰 아들이 잘 못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고 잔치를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럼 남은 아흔 아홉 마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자신을 아흔아홉 마리 양떼에 속해 있을 뿐더러, 길을 잃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처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그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도 알 수 없습니다. 길을 잃은 양이 목자를 찾듯, 목자가 잃은 양을 찾듯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는 분이자, 우리가 찾아 만나야 할 분이십니다. 주 안에서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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