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 15:18)
쉽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화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먼저 자신을 상하게 할 테니까요. 그럼에도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갚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출 21: 25) 그것을 우리는 ‘공평’이라고 부릅니다.
분노할 때 우리의 내면은 마치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휘두릅니다. 언제 분노합니까? ‘이건 아니지’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내가 옳다는 겁니다. 공평의 저울질로, 나의 옳음과 너의 틀림으로 인해 분노합니다. 그리고 분노는 항상 대상이 있습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화를 내진 않을 테죠. 그렇듯 상대가 화나게 한다고 해도, 화를 내고 말고는 자신에게 달린 일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화를 쉽게 내는 사람이 있고, 크게 화 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분노는 너의 문제이기 이전에 나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약 1:20)
내가 옳다고 분을 내며, 나의 뜻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실은 내 마음 같지 않다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겁니다. 분노는 타자를 향할 때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 드러나고, 자신을 향할 때 자학으로, 자기연민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듯 분노는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골 3:8)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9) 라고 하십니다. 새롭게 하심을 입기 위해, 먼저 ‘벗어버림’ 이 필요합니다. 나의 의를 내려놓아야,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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