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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몸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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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1 윤영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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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21-24

눈은 몸의 등불

 

 

(마 6.21-24) 눈은 몸의 등불 (20190901)

 

 

  1.  

 

           여러분, 우리가 움직일 때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하기 위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몸을 많이 사용하는 육체노동을 할 때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일 때 뿐만이 아니라, 뇌를 쓸 때에도, 우리가 생각할 때에도 그 생각을 하기 위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을 해서 생각하다보면 금방 배가 고프고, 몸에 기운이 빠지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을 움직일 때에도 우리 몸속에 있는 피가 흐르면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데, 머리를 쓰고 생각을 할 때에는 더 많은 피가 필요하게 됩니다. 더 빨리 돌면서, 생각할 때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몸속에 있는 피가 바로 기름 역할을 해 주는 것이죠. 그래서 예민한 사람은 조금만 머리를 써도 금방 지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냥 아무 생각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면 되겠죠? 생각이 너무 많으니까, 그 생각을 안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또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물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살을 아주 세게 하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겠죠? 그런데 세게 흘러가는 물을 막으려고 할 때에도, 거기에도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가 하루의 삶을 돌아봐도 쉴 새 없이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합니까? 일어나자 마자, 아침은 뭘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까?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여튼 쉬지 않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생각들을 차단하고 중단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생각을 할 때보다 몇 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이렇듯 우리가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멈추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이 생각들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왜 생각이라는 것을, 사고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는 것일까요?

 

           옆에 계신 분들을 한 번 보시겠어요? 어떻습니까? 이왕 보신 김에 칭찬 한 번 해주시면 어떨까요?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을 보니까 어떠세요? 뭐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계시겠죠? 바로 이것입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의 눈을 통해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어떤 모습이나 장면들이 우리의 뇌로 들어오게 되고, 들어온 이 정보를 우리의 뇌가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일을 하기 시작한 뇌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겠죠? 바로 이런 작업들이 우리가 부르는 ‘생각’ 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2019년 우리 교회의 주제를 한 번 보시겠어요? ‘바른 교회, 밝은 교회, 건강한 교회’ 저걸 보면, 저 나무 글자를 어떻게 붙였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눈을 돌려 위에 걸려 있는 하반기 신앙 주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 모두가 예수의 따뜻한 심장을 가지면 참 행복한 교회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을 돌려 여러분은 지금 저를 보고 있습니다. 저를 보면서 말씀을 듣고 계시지요. ‘아~ 오늘따라 목사님이 더 잘 멋져 보이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던 중 잠시 눈을 돌려 옆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목사님보다 더 멋진 분이 여기 계시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제 생각을 따라오셨나요? 이것이 바로 생각의 시작입니다. 눈을 통해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결국 거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눈이 그 생각과 그 마음과 그리고 온 몸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그것에, 그 곳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다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이 머무는 곳에 집중한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마음이 있는 곳에 눈이 간다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관심 있는 것, 내가 늘 머릿속에 담고 있는 것을, 눈을 돌려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먼저 바라보게 되고, 싫어하는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22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뭐라고 합니까? 눈은 몸의 등불이니...... 이때까지 말씀 드린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눈은 몸과 마음까지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성해서 옳은 것을 바라보고, 이 눈을 통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 옳은 것을 제대로 비춰주면, 우리의 몸도, 우리의 마음도 환하게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우리의 눈이 나쁜 것을 향해서, 그릇된 것, 잘못된 것, 죄의 길, 욕심, 물질을 바라보면 우리의 몸과 마음도 그런 것들로 오염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것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우리의 상태와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말하는 ‘눈’ 이라는 것이, 그저 생물학적으로 우리의 얼굴의 3분의2 지점에 위치한 안구 만을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눈’ 이라는 이 단어가, 보고 판단하기 위한 신체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것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때로는 하나님을 향해 있지만, 하늘을 향해 있지만, 어떤 때에는 하나님과 너무나 동떨어져, 하나님이 원치 않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가 있기도 합니다. 무엇이 잘못이겠습니까? 그 대상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느냐?? 어떤 곳을 향하고 있느냐?? 그 눈,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해 바라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1.  

 

           그리스 신화에 보면, 메두사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메두사는 신의 저주로 인해서 고왔던 머리카락이 모두 뱀으로 변하고,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누구나 돌로 변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메두사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변해버린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그리고 아무도 봐주지 않는 외로움을 느끼면서 오히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지요. 두려움이나 거짓,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편안하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볼 수 있지만, 관계가 이상이 생기면, 그때마다 우리 눈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딸아이 은오와 함께 지내다 보면, 무슨 잘못을 했거나, 기분이 상해 있거나, 화가 났을 때에는 눈을 마주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은오만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은오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딸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은오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에는 눈을 마주쳐 바라봐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따라, 우리의 눈이 달라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옛 사람들은 밖으로 향한 눈보다는, 안으로 열린 눈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는 성찰이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으로 여겼던 것이죠. 그런데 성찰의 시간을 잘 갖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자신을 살피는 고독의 시간,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잘 갖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의 경우 대개 시선이 상대방을 향해 있습니다.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훈련이 안 되어있으니,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 상대방만 바라보는 거지요.

 

           그나마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가꿀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마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잘못에만 눈이 쏠립니다. 작은 티끌이라도 찾아내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상대가 그럴 수 있다는 여유를 주지 못합니다. 그렇게 상대를 지적해야, 자신의 감추고자 하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상대의 부족함을 지적해야, 자신의 허물이 지적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신앙인에게 성찰의 시간은 말씀을 보는 시간이고, 기도를 하는 시간입니다. 단지 내 말만 가득 늘어놓는 중언부언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거울삼아 남의 허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지요.

 

           하나님 앞에서 성찰의 삶을 사는 이들은, 남의 허물을 찾고 또 지적하는 일에 열중하지 않습니다. 내 안의 못난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여유로움과,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것을 바라보고, 다른 이들을 품어주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셨지만, 그것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잘못이나 약함을 감추거나, 스스로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상처와 나약함을 지적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그것을 사랑으로 부둥켜안으셨습니다. 때로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또 때로는 따스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참 삶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끌어낼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주님은, 반평생을 고기만 잡던 베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수님만 따르는 제자로 이끌어주셨지요. 베드로에게 못난 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허물투성이 베드로였지만, 발길에 체이는 돌을 다듬어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듯이, 그 모진 원석과 다름없었던 베드로를 세상에서 그 어떤 보석보다 귀한 주님의 제자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약한 점, 단점만을 지적했다면, 그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을 꼬집어 정답을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사람이 나와는 달라도, 그 사람에게 추한점이 있을지라도, 또 다른 아름다움을 칭찬하여 스스로 바른 길에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단점만 지적한다면 오히려 반감을 일으켜 더 나쁜 상황이 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눈이 밝은 분이셨습니다. 밝고 아름다운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았기에, 베드로 또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머물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바라보는 그 곳에 내 눈이 머물기를 원해요’ 참 중요한 고백인 것 같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은, 여러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주님의 눈으로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한 두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라는 아주 짧은 시를 통해서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지혜를 깨우쳐 줍니다. 아주 짧은 시인데요, 그 시는 이렇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풀꽃이 그렇다는 거지요. 들에 핀 아주 작은 풀꽃들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외면 받지만,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겁니다. 하물며 저마다의 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그 꽃의 향기까지 맡을 수 있다는 그런 말이겠지요.

 

           단순하지만 큰 울림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비로소 사물이나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세히, 오래 보지 못하고, 대충, 스치듯 바라보고 평가해버립니다. 그러니 사람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나님의 마음에 머물러야 하고,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의 시선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몸이 어둡지 않고, 성해서 온 몸이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내 안에 머물러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다른 것들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니게 됩니다. 하지만 내 안에 이미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이 성하게 빛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면의 눈을 열어 성찰의 시간,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뭔가를 구하기만 하는 게 아니지요. 하나님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은 어둡지 않습니까?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지 않아도 괜찮은 것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까? 버릴 것은 버리고, 비울 것은 비워야, 꼭 붙들어야 하는 것을 붙들 수 있고, 채워야 할 것들을 채울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 우리 속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안의 나를 바라봅시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부족한 곳에 시선을 두지 말고, 그 안에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을 보며 사랑해줍시다. 그리고 말로 아름답다 칭찬해 줍시다. “우리 바로 실천하면 어떻겠습니까? 옆에 있는 분들게, 앞뒤에 있는 분들게 ‘참 아름다운 꽃을 품고 계십니다’

 

           올 해도 어느덧 꽤 많은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성찰을 통해, 하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격려하며 더욱 단단해지는 공동체, 아름다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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